능선따라 걷는 길

무주 적상산

미지부동산 2013. 11. 11. 11:58

(2013.11.10. 일요일. 맑음)

지난 밤에는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면서 겨울을 재촉하고 있었다.

내일 산행에 전국적으로 비가 온다고 하니 약간 걱정스럽기도하다.

산행시 기후가 많은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무주 적상산을 등정하기로 되어 있어 약간 설레임이인다.

 

이 지역은 내가 군복무시절 약 한달여간 훈련을 하면서 천리행군을 하였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후 한번도 이곳을 산행하지 못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벌써 33년이 지났다.

지금 그 지역은 얼마나 많이 변모해 있을까?

그당시 매일 7백고지이상의 산들을 몇개씩 넘어야 했으며

가도가도 끝이 없던 그 길들.....

길의 끝은  어딘가 하고 수없이 생각했었지 !

 

오늘  등정하기로 하는 적상산 !

붉을 적(赤)자에 치마상(裳)으로 되어 있어

붉은 치마를 입은 산이란 뜻으로  산이 붉은 치마를 입을 수는 없으므로

붉은 단풍으로 병풍처럼 둘러싸인  아름다운 경치를 간직한 산이란 뜻으로 의인화 되었을 것이다.

한반도는 전국 곳곳이 아름다워 금수강산이라 하지 않던가!

그러나 그중에서도 얼마나 아름다우면 붉은 치마를 두른듯 하였다고 표현했을까? 하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덧 우리의 애마는 적상산 첫 출발점인 서창지킴이터에 도착했다.

 

어제의 날씨와는 전혀 다르게 화창한 날씨에 공기가 서늘하여 산행하기에 아주 적당하였다.

입구에는 벌써 마지막 지는 단풍을 즐기기 위해

각지에서 수많은 인파가 화려한 의상으로 치장하고

지방색이 완연한 어투로 즐겁게 웃으며 떠들고 서로를 부르고 하는 모습들이 꼭 시장터를 연상시켰다.

 

적상산을 오르는 등산객들의 의상은 얼마 남지 않은 단풍들과 어우러져 마치 의상쇼를 펼치는 것 같았으며

정상을 향하는  사람들의 행렬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으며 모두들 즐거운 표정으로 자신들의 건강과 얼마남지 않은 단풍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있는것 같다.

그러나 이 땅을 지켜낸 우리 선조들은 지금의 우리가 산행해는 것과 비슷하였으리라 보나  그때의 산을 오르는 행렬들은 우.마소에 짐을 싣고 자신들의 등과 머리에 지고 이고

오직 살기  위해 이 적상산을 향해 올랐을 것이다.

 

이곳 적상산성은 주변을 조망하기 수월하고 적으로부터 은폐.엄폐가 가능해 적을 방어하기에 최적의 산성이다. 또한 물이 풍부하여 오랫동안 적으로 부터 수성하기에 용이할뿐만 아니라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적을 괴롭히기에 적당한 곳으로 보인다.

 

이런 지리적 이점때문에 삼국시대때 백제와 신라는 이 산성을 쟁취하기 위해 수많은 전투를 감행하였으며, 고려때 거란족의 침입으로 주변지역이 모두 도륙되는 참담한 처지에 놓여 있을때 이 적상산성으로 피신하신 사람들은 구사일생하였을 것이다.

고려말 최영장군이 제주도에 출몰한 왜구를 토벌하고 개경으로 금의환향하던중 이곳 산성의 빼어난 전략적가치에 반해 왕에게 산성을 축조할 것을 주청하였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며 그래서 산성 바로밑에 장도바위의 전설이 생겨난 것으로 본다.

 

이 적상산이 많은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산의 아름다운 자연경관보다 오히려 조선왕조실록이 이곳에 보관되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조선시대는 4대 사고가 있었다

조선전기인 임진왜란 (1592년4월13일부산 동래성 침략. 14일 함락)전에는

서울춘추관사고, 충주, 성주, 전주 로 4곳에 보관하던중 임진왜란으로 "전주사고"를 제외한 모든실록은 불타므로, 임란후에 "전주사고"본을 복사하여 춘추관, 묘향산, 태백산, 오대산, 마니산에 새로 5곳을 설치하여 실록을 보관하던중 1624년 '이괄의 난'으로 춘추관사고는 소실되었다.

이후 묘향산 사고는 후금(뒤의 청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여 천연의 요새인 무주의 적상산 사고로 이전하였다.

강화도의 마니산 사고는1660년(현종1년)에 강화도의 전등사를 수호사찰로하는 정족산 사고로 이전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4대사고의 실록 모두를 조선총독부에서 접수하여

정족산, 태백산 사고의 실록은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교)로

적상산 사고본은 이왕직 소속의 도서관인 창경국 장서각으로 옮겼고

오대산 사고의 실록은 1913년 도쿄제국대학으로 반출하였는데 1923년 관동대지진때 대부분 불타 없어진

것으로 알려졌으나, 2006년초에 도쿄대학 도서관 귀중서고에 소장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환수 노력끝에 2006년 7월 도쿄대학으로부터 47책을 반환받았다.

적상산 사고본은 1950년 6.25 전쟁때 북한으로 옮겨져, 현재 김일성 종합대학에 소장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의 사회.경제. 문화. 정치. 외교. 군사.법률. 사상. 생활 등 다방면에 걸쳐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여 수록하고 있는 진실성과 신빙성이 매우 높게 평가되어, 실록은 국보뿐만아니라 1997.10.1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세계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이렇게 조선왕조실록(전주사고)이 현재까지 우리에게 전해질수 있기까지는 목숨을 걸고 사고를 지켜내려고 하였던 경기전 참봉 오희길과 태인지방 선비 손홍록, 안의를 비롯해 무사 김홍무. 수복 한춘 등 이 지역 사람들의 죽음을 불사한 노고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들은 실록을 정읍 내장산으로 옮겼다가  계속 왜구들의 호남침공이 예상되므로 충남 아산 으로 또 황해도 해주로 옮겼다가 임진왜란의 전황이 소강상태에 이르자 1595년 강화도로 옮긴다.

이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실록은 안주를 거쳐 평안도 안변의 묘향산 보현사 별전으로 옮겼고  임란이 끝날때까지 보존해 오다가 영변부 객사를 거쳐 1603년 강화도로 옮겼다.

 

조선왕조실록의 중요성과 가치에 대해 말로 표현하기는 힘들다고 본다. 기록이란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요즘 중국과 일본의 분쟁지역인 센카쿠열도와 일본놈들이 자꾸 자기네 영토라고 우기는 독도에 대해서도 서로 상대방 국가를 납득시킬수 있는 공식적인 기록이 없기때문에 서로 우기고 있다고 본다.

어떤 민족이든 그 당시의 글과 기록이 없다면 세월의 흐름에 의하여 융성했던 문화. 문명이 있었는지 조차 알 수 없게 된다.

비근한 예를들면 중앙아메리카의 마야문명의 경우 아직 문자를 해독하지 못해 그때 당시의 찬란한 문화. 문명이 있던 것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특히 남미의 잉카문명은 당시 1.000만명이상을 거느린 거대 제국을 건설하였으나, 멸망한 후 자신의 글과 기록이 없다보니 그 당시 상황에 대해 현재는 전하는 것이 없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집트 문명에 대해 프랑스의 샹폴리옹에 의해 해석되므로,

이집트의 찬란한 문명이 이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중국의 경우는 공자와 같은 성인뿐 아니라

특히 사마천의 '사기'에 의해 공자가 노나라에서 전해오던 상고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춘추'를 보완하여 3,000년전의 역사를 한무제이전인 기원전 104년부터 기원전 91년까지 약 13년간 저술한 기록들이,

각 지역에서 발굴된 유물 등에 의해 확인되므로 중국이 문화. 문명 국가임을 자처하고, 한반도를 자신의 변방의 부속국가로 취급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동북공정같은 역사왜곡을 국가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작금의 한반도 정세는 남북이 분단된 상태인데다, 북은 북대로 남은 남대로 아전인수격으로 자신의 정치기반을 다지기 위해 국가와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속한 집단의 이익만 생각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하고 어처구니 없는 지경에 이른 것 같다.

 

적상산이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참으로 크다고 하겠다.

우리는 지금 하루하루 바쁘게 보내면서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 한반도를 지켜낸 우리 조상들은 자신의 안위와 부귀영화보다 이 한반도를 지켜내기 위해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살았던 것이다.

 

적상산에 유역변경식 양수발전소가 생기므로 적상산 사고를 지키던 수호사찰인 안국사와 적상산 사고지 터가 댐에 의해 수몰되므로, 안국사는 현재의 위치로 옮겨져 재창건되었고, 사고지는 폐허가 되었던 사고지를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복원하였다. 

대부분 사고지는 실록의 재질들이 종이로 되어있기 때문에 벌레나 좀이 같은 것에 의해 훼손되기 쉬우므로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통풍이 잘되고 습하지 않는 곳에 보관하게된다.

이런 곳을 찾기 위해 조선시대때 정부에서 지관이란 관리를 두어 전국곳곳에 있는 명당을 찾아 사고를 건축하였다. 애석하게도 예전에 있었던 사고지의 터전을 볼 수 없어서 안타까왔다.

 

안렴대에서 멀리보이는 덕유산의 최고봉인 향적봉을 따라 길게 뻗어있는 스키장을 바라보면서 앞으로 하얀 설원을 마음껏 달릴 스키어를 상상하니 괜히 기분이 좋다. 

안렴대부근에서 몇몇회원들과 맛있게  점심을 먹었는데, 오늘 처음 온 회원님이 많은양의 모시떡을  가져와 입이 호사하는 영광을 누렸다.

 

양수발전소와 주변경치를 조망하기 좋게 건축해논 전망대에 올라,  전망대를 몇바퀴 빙빙 돌면서 주변경관을 보니 날씨가 맑은 탓인지 멀리까지 시야가 확트여 참으로 감개무량하기 그지 없었다.

하산 도중 치목 1킬로미터 지점에서 타 산악회 소속의 한 아주머니의 추락사고가 있었다. 지난 밤 비로 인하여 낙옆에 물기가 남아 있어 미끄러지는 불상사가 있었는데 급히 119구조대에 긴급연락하여 구조대원들이 올라가는 것을 보면서 참으로 고생  많이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덧 목적지인 치목에 도착해 보니 벌써 많은 회원들이 도착하여 여장을 풀고 편안한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저녁먹기에는 이른 시간대이지만 무주읍 시장터에 있는 순대국밥집에서 저녁먹고 출발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주변 시장을 둘러보니 일요일이라 그런지 상가들은 모두 철시하여 조용하였다.

그러나 지금 이곳 무주에는 세계태권도 메카로 정해져, 세계에 퍼져 있는 태권도인들이 자신들이 닦은 기량과 자신들이 속한 집단과 나라들을 위해 국위를 선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그 함성이 온 세계에 울려퍼지게 될 것이다.

울려퍼지는 함성소리가 세계인의 가슴속을 고동치게 하여 다시 반향으로 메아리로 되돌아 올수 있기를 바랄뿐이다.